고쿠타카 예문
예문
- 간분 이후로는 번에서 주도하는 신전 개발도 행해져, 1백 년 후인 에도 중기에는 당시 고쿠타카 200만 석을 웃도는 일본 최대 수준의 번으로까지 성장하기에 이르렀다.
- 번이 위치하고 있는 가고시마의 토양은 대부분 수질이 나빠서 경작이 곤란한 시라스 대지였기에 토지는 척박하고 겉으로는 고쿠타카 77만 석이라고는 했지만 실질적으로 35만 석 정도의 수익을 내는 정도에 그쳤다.
- 막부의 일본 통치가 안정기에 접어들고 전투도 일어나지 않자 마사무네는 영토 개발에 매진했고 후일 데이잔보리라 불리는 운하를 정비했으며, 기타카미 강 수계 유역을 정리하고 개척하여 오늘날까지 손꼽히는 곡창지대로 거듭나게 한 결과 센다이 번은 표면상으로는 62만 석으로 불리는 것과는 달리 고쿠타카 1백만 석을 훨씬 넘는 쌀 생산량을 확보하기에 이른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