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우참찬 예문

"우참찬" 뜻  

예문모바일

  • 이어 예조판서, 우참찬 등을 지내고 74세에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.
  • 영조 17년에는 예문관 제학, 영조 19년에는 우참찬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.
  • 숙종 즉위 초 우참찬 겸 성균관좨주와 좌참찬,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지만 재산 욕심을 부리지 않은 덕에 매우 가난하였다.
  • 등의 벼슬을 지낸 뒤 우참찬, 좌참찬, 우찬성, 좌찬성 등을 두루 거쳐 우의정이 되고 좌의정으로 승진한 뒤 영의정에 올랐다.
  • 그는 소론파의 거두였던 윤증, 같은 반남 박씨인 박세채, 처숙부 남이성, 처남 남구만 등과 교유하였고, 우참찬 이덕수, 함경감사 이탄, 좌의정 조태억 등의 제자를 양성하였다.
  • 영중추부사 홍언필, 영의정 윤인경, 우찬성 임백령, 우참찬 신광한 등을 불러 윤임의 손자이므로 폐하여 서인을 만들어야 한데, 율문은 그러하나 다만 선왕의 자손을 속천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논의하게 했다.
  • 영의정 유순은 조광조와 대간 모두 옳다고 하는 한편, 그러자 좌의정 정광필, 우의정 김응기, 우찬성 김전, 우참찬 남곤은 "조광조의 견해가 옳다"고 하였고, "이에 따라 대간의 거취를 정해야 한다"고 하였다.
  • 조선 중기부터 조선사회와 중앙정계를 지배한 사림들 중에서 매우 앞선 시기인 세조5년에 이 마을의 손소공이 문과에 급제하고 중앙정치 무대에 진출하여 이시애의 난을 진압할 때 공을 세워 공신이 되고, 이어서 그의 둘째 아들인 손중돈 선생이 성종 2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판서, 우참찬 등 40여년 동안 요직을 두루 거치고 청백리에 올랐다.